-
목차
고요한 시골 마을에 숨겨진 백제의 흔적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선창리에 위치한 번암 고분군은 아직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백제 후기의 고분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이 고분군은 주로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초반까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말기 장수지역의 지방 통치체계와 지배층의 무덤 양식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고분은 대부분 횡혈식 석실분이며, 돌을 쌓아 만든 무덤방과 진입로인 연도가 길게 이어지는 구조가 특징입니다. 이는 중국 남조계 묘제와 유사한 형식으로, 백제가 외래문화를 적극 수용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장수 지역은 백제의 동부 방면 교통·군사 요충지로 기능했던 만큼, 고분 유적의 분포는 단순한 묘지가 아닌 지역 지배권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해석됩니다.
번암 고분군의 발굴과 역사적 가치
번암 고분군은 1980년대 이후 학술조사를 통해 20여 기 이상의 고분이 확인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구조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어 백제 고분 연구에 있어 핵심적 자료로 손꼽습니다. 발굴 결과, 고분 내에서는 철기류, 토기, 청동제 장식품 등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무기와 말 장비류로 확인되어 피장자가 단순한 지방 유지가 아닌 군사적 권한을 가진 유력자였음을 추정하게 합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일부 고분에서 이질적인 문화 요소가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고분의 피장자가 외부 세력과의 교류, 혹은 혼인을 통해 정치적 연합을 이루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번암 고분군은 백제의 지방 지배 체계와 당시 국제 질서 속에서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기능하고 있는 셈입니다. 발굴 성과는 현재 전주 국립전주박물관 등에 일부 전시되어 있으며,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분의 배치와 장수의 지리적 전략성
번암 고분군은 장수盆地(분지)의 동북쪽에 위치한 야트막한 구릉지대에 조성되어 있으며, 무덤들은 일정한 방향성과 간격을 갖추어 배열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매장 공간 이상의 계획적이고 상징적인 공간 구성을 의미합니다. 고분이 위치한 장수 지역은 금강 상류와 가까우며, 무령왕 시기 이후 백제의 내륙 방어와 물류 이동의 관문역할을 했던 지역입니다.
또한, 장수는 백제의 중요한 성 중 하나인 익산 미륵사지 및 왕궁리 유적과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지형적으로는 호남과 영남을 잇는 교통축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리적 요건이 뛰어난 곳에 대규모 고분이 조성되었다는 점은, 이곳이 단순한 지방이 아닌 전략적 중심지의 위상을 가졌음을 암시합니다. 번암 고분군의 위치는 문화유산의 가치뿐 아니라, 고대 정치지리학의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분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추천 관광코스: 문화유산 방문자여권과 함께하는 장수·진안 역사기행
번암 고분군은 현재 문화유산 방문자여권 공식 코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주변 지역에는 이미 여권에 포함된 주요 문화유산들이 포진해 있어 연계 관광지로 매우 적합합니다.
예를 들어, 인근 진안 마이산 탑사는 독창적인 민간신앙 석탑 군으로 유명하며, 국가지정 문화재로도 등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명소인 무주 안국사와 적상산성, 장수 의암주논개 생가지 등은 조선시대와 의병 역사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 추천됩니다.
이 코스를 따라 여행한다면, 백제 후기 고분문화 → 고려·조선 불교문화 → 근대 민족운동사까지 시대별로 유기적인 관람이 가능합니다. 특히 번암 고분군은 대규모 군중 없이도 조용히 사색하며 둘러볼 수 있는 장소로, 역사 애호가와 고요한 문화기행을 선호하는 여행객에게 이상적입니다.
추천 코스:
번암 고분군 → 장수군 향토문화관 → 마이산 탑사 → 무주 적상산성 → 안국사 → 논개 생가지
유산의 미래를 위한 과제와 보존 방향
현재 번암 고분군은 일부만 정비되어 있어 관람 편의성이나 안내 인프라가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오히려 오염되지 않은 원형의 자연환경과 유산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향후에는 고분군 주변에 소규모 탐방로와 해설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학술적 가치와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지역 문화재로서만 머무르지 않고, 국가차원의 고분군 정비사업과 연계하여 문화유산 방문자여권 코스에 포함된다면 유산의 위상이 한층 높아질 수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참여와 관심, 그리고 지방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동반된다면 번암 고분군은 단지 ‘숨겨진 유적’이 아닌, 새롭게 조명받는 백제의 후반기 역사 현장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국가유산 방문자여권 완주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조루, 호남 명문가의 삶이 깃든 공간 (0) 2025.07.18 청송 송소고택, 10대가 살아온 시간의 집 (0) 2025.07.17 천년의 방어선, 청주 상당산성에서 만나는 충청의 역사 (0) 2025.07.15 홍성 결성향교와 결성읍성, 유교의 숨결과 방어의 흔적이 만나는 공간 (0) 2025.07.13 군위 인각사와 일연대사, 삼국유사의 숨결이 깃든 천년의 절터 (0) 2025.07.12